옛 이야기 98

고려장의 진실

고려장은 일본이 만들어낸 날조된 역사로 이는 일제가 조선 문화재를 도굴하려 만들어낸 용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전국을 뒤져 조선의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무덤속의 부장품까지 탐을 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죽은자의 무덤을 건드리길 극도로 꺼려하는 조선인들의 정서상 인부들을 부리기 힘들었고 결국 조선인 인부들을 회유하려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조선인들은 고려장이란 못된 풍습을 갖고 있으니 이런 자의 무덤은 파헤쳐도 된다고 회유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1908년 기사에 의하면 근일에 일인들이 무덤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는 글이 실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일인들이 일본의 오모스테산 전설을 조선에 들여와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

옛 이야기 2022.08.15

치우천왕과 삼국사기

어린 시절, 국사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고조선이다. 국사 책에는 단군이 조선(朝鮮)을 개국한 것이 BC 2333년인데, 갑자기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왕검성이 함락된다는 망국 이야기로 끝맺는다. 반만년 역사 중 고조선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2113년)보다 그 이전 고조선(2225년)의 역사가 더 길다. 그런데 고조선과 관련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단군신화, 홍익인간·재세이화(在世理化), 3개 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8조법금, 그리고 멸망. 그게 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 국어 고문 시간에 배운 백수광부(白首狂夫·흰머리 미치광이)의 처가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2천년 뒤,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되살아나기도 했다)가 고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고조선에 대한 전부다...

옛 이야기 2022.08.04

대륙가야

조선의 역사 가운데서 신비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 신비한 역사 가운데서 "가야"만큼 아리송한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 경상도, 특히 김해 지방에서 유물이 나오기만 하면 거의 "가야"유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야에는 김수로가 건국했다는 "금관가야"에서부터 "대가야·소가야·고녕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가 그것이다. 이런 가야의 이름에도 비슷한 소리의 글자가 많다. 이것은 나중에 인도로 지역이 이동되면서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金官伽倻: 駕洛·南+伽倻·伽耶·加耶 大伽倻: 高靈·大+加耶·加羅. 伴跛 小伽倻: 固城+固城. 久差·古嵯· 古寧伽倻: 咸昌+伽倻·伽耶·加耶 阿羅伽倻: 咸安·安羅·阿尸良·呵耶+伽倻·伽耶·加耶 星山伽倻: 星州·碧珍+伽倻·伽耶 非火伽倻: 昌寧·比自 이렇게 많은 가야에서..

옛 이야기 2022.08.04

고구려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고구려(高九黎)는 B.C 239년에 해모수(解慕漱)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해모수는 임술년(B.C 239년)에 웅심산에서 일어나 난빈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高九黎)를 건국하였고, 다음해 계해년(B.C 238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수도 장당경(藏唐經)을 고립(孤立)시키기 위하여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비(箕丕)와 몰래 약속하고 해모수는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 장춘 방면)을 점령하여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經)을 북쪽에서 고립시켰고,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비(箕丕)는 요동반도 방면에서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남쪽에서 고립시켰다. 해모수와 기비가 단군조선의 수도를 고립시키자 단군조선의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은 더 견딜 수 없어 오가(五加..

옛 이야기 2022.07.29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본다.68) 그러나 고조선은 나라가 막 세워진 BCE 24세기에 벌써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나라이다. 주류 사학계의 논리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 이전인 BCE 2333년에는 국가가 있을 수 없다. 청동기 단계에 이르러야 고대 국가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등장하기 이전 석기만 사용하면서도 고대국가를 건설하였고, 4천5백 년 전에 이루어진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후기 베다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옛 이야기 2022.07.19

중국 전역이 한반도의 역사였다는 미스테리한 진실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

옛 이야기 2022.06.30

중국전역이 한반도의 역사였다는 미스테리같은 진실

역사의 미스테리같은 진실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옛 이야기 2021.12.18

천리(天理)를 헤아린 괘사(卦師)와 전봉준

천리(天理)를 헤아린 괘사(卦師)와 전봉준 "엇! 이게 웬 괴변일까?" 녹두장군 전봉준이 나를 죽이려고 말을 달리고 있다니, 지금까지 이 늙은이가 녹두장군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왔는데, 그리하여 어려운 지경에 놓인 전세를 승전세로 이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는 나를 죽이려고 말을 달리다니 그것 참 괘씸한 지고!" 이 이야기는 약 100(1894)여 년 전에 있었던, 동학혁명 당시의 전봉준과 유명한 대 역학가와의 사이에 있었던 비화이다. 일국의 임금이 되는 왕도에 있어서나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이를테면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봉기들을 수행하는데, 표면에 드러나는 선봉장 뒤에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알고 땅의 변화무쌍함을 아는 회천지혜인(回天知慧人)이 있기 마련이었다. 중..

옛 이야기 2021.11.26

조선 태종이 모든 정사를 세종에게 넘기고풍양궁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조선 태종이 모든 정사를 세종에게 넘기고 풍양궁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 어느 날 우연히 두 하급 관리가 서로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논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 청색 옷을 입은 한 관리가 말하기를. “부귀와 영달은 모두 임금에게서 나온다.” 고 합니다 ​ 이에 홍색 옷을 입은 다른 관리는 반박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한 계급이 오르거나 한 벼슬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는 것입니다 ​ 두 관리는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엿듣고 나서 다음 날 “지금 이 글을 가지고 가는 아전을 한 직급 올려 주기 바라오”라는 글을 종이에 써서 청색 옷을 입은 관리를 시켜 세종에게 보냈습니다. ​ 그런데 가는 도중에 ..

옛 이야기 2021.10.08

고대 격투기, 각저(角抵)

유도(柔道)는 12세기 무렵부터 일본의 무가(武家)에서 내려오던 것을 1882년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郞)가 현재의 형태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도·레슬링·씨름 등 동양 격투기의 원형은 그 훨씬 전에 있었던 각저(角抵)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사(李斯)열전에는 "이때 진(秦)나라 이세(二世) 황제가 감천(甘泉)에서 배우(優俳)들의 곡저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응소(應召力)는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전국(戰國)시대에 있었던 '무술시범(講武之禮)'이 진나라에서 각저(角抵)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부여조에는 "후한 순제(順帝:서기 136년) 때 부여 국왕이 방문하자 각저희를 관람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대 중국에도 각저가 성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옛 이야기 2021.09.19

* 대원군의 뺨을 때린 將帥(장수)

* 대원군의 뺨을 때린 將帥(장수) 조선 말엽 왕족인 이하응은 제26대 고종의 아버지다. 이하응의 아들 명복이 12세에 제26대 고종으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였다. 그런 이하응이 젊었던 시절 이야기다.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 술집에서 추태를 부리자 종2품 무관 이장렴이 말렸다. 화가 난 이하응이 소리쳤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 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습니다. 이장..

옛 이야기 2021.06.21

배달겨레, ‘동이東夷’

배달겨레, ‘동이東夷’ 고대 동북아에서 수천 년 동안 위엄을 떨친 치우천황은 우리 역사에 또 다른 자취를 남겼다.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래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동이의‘ 이夷’는 자전字典에서‘ 큰 활을 잘 쏘는 동방 사람[東方之人也 從大從弓]’으로 풀이되는데, 이것은 치우천황이 쓴 큰 활의 위력에 놀란 서방 한족이 동방 민족을 동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夷’는 또한‘ 신을 대신하는 사람’과‘ 어진 사람’을 뜻한다. 은나라 갑골문에서 이夷는 시尸, 인人과 똑같이‘ 사람이 똑바로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시尸는 제사 때 신이 응감하도록 세워 놓은 신상으로‘ 신의 대리인’을 뜻한다. 이렇게‘ 이夷’를‘ 신의 대리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 것은 당시..

옛 이야기 2021.06.11

한민족 최초국가 배달

한민족 최초국가 배달 거발환 환웅의 건국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 기후변동으로 환족의 일부가 근동으로 이주하여 수메르문명을 개척하고 있을 때 환족의 다른 한 갈래가 동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인류의 첫 나라 환국 속에 구환족이모두 통일되어 있던 시대가 끝나고, 나비의 두 날개처럼 인류 문명이 동서로 분화되는 극적인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환국시대 말, 인구 증가와 물자 부족으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서자부庶子部 부족의 환웅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기를 갈망하였다. 이에 삼위산과 백두산을 두루 살펴 본 환국의 마지막 임금인 지위리智爲利 환인께서 백두산을‘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하고, 환웅을 동방 개척의 선봉장으로 세우셨다. 환인은 백두산을 향해 떠나는 환웅에게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

옛 이야기 2021.06.11

무영탑(無影塔)

무영탑(無影塔) 이른 봄이었다.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돌을 다듬는 정소리가 화창한 햇빛 속에서 튀었다. 숲 속에서는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는 둔탁한 음향이 들려왔다. 스산한 바람이 아사녀의 치마를 펄럭이게 했다. 아사녀는 연못가를 돌며 이따금 공사가 한창인 불국사 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려진 불국사를 바라다보는 아사녀의 눈엔, 어느 덧 이슬이 맺혀 여위어 까칠해진 볼을 타고 흘렀다. 아사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못 속을 들여다보았다. 못 속에는 흐르는 흰 구름 사이로 한참 쌓아 올라가고 있는 다보탑과 대웅전, 백운교, 청운교가 비쳐 있었다. 그러나 아사녀의 남편 아사달도, 아사달이 돌을 깎고 쪼아 쌓고 있을 석가탑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는 눈물을 닦고 다시 ..

옛 이야기 2021.05.29

성씨 이야기

성씨 이야기 우리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 삼국시대 ≫ 고구려 : 우리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옛 이야기 2021.05.29

고구려, 금, 청의 뿌리는 카자흐스탄

금·청의 황제가 신라인들이며 한민족의 형제라면. 또 부여·고구려·징기스칸이 2000년 전 알타이 국가 ‘고리(까오리)’의 혈맥을 공유한다면 이를 믿을 것인가.(1) 역사는 이웃 민족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다(구술 포함) 한 때는 약자였다가 한 때는 강자로 돌아서 이웃을 통치하고 통치 받기도 하던 때, 그 기록들을 들여다 보면서 강자의 위세함과 약자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약자의 자존심을 숨기고 강자의 위대함을 애써 과장, 강조하는게 현실임을 감안 한다면 위 서문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금.청의 황제는 신라인들이라는 미스터리는 '한국사 미스터리'에서 익히 참고 하였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일까? 물론 부여라고 답을 내어 놓아도 틀린 것이..

옛 이야기 2021.02.11

한민족의 국통맥

북부여의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옛 이야기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