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고구려(高九黎)는 B.C 239년에 해모수(解慕漱)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해모수는 임술년(B.C 239년)에 웅심산에서 일어나 난빈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高九黎)를 건국하였고, 다음해 계해년(B.C 238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수도 장당경(藏唐經)을 고립(孤立)시키기 위하여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비(箕丕)와 몰래 약속하고 해모수는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 장춘 방면)을 점령하여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經)을 북쪽에서 고립시켰고,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비(箕丕)는 요동반도 방면에서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남쪽에서 고립시켰다. 해모수와 기비가 단군조선의 수도를 고립시키자 단군조선의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은 더 견딜 수 없어 오가(五加)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들어감으로써 단군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열가(高列加) 단군 계해 58년(B.C 238년) 단군께서는 어질었으나 결단력이 없어,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이 용맹만을 믿고 자주 난리를 피우니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중략..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註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니 사방에서 모두 복종했다. 때에 여러 장수들의 관위를 올려 봉하고,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왕으로 삼아 상하운장을 지키게 하니,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또한 고구려라 칭했다. 癸亥五十八年 帝仁柔不斷 令多不行 諸將恃勇 禍亂頻起國用不敷 民氣益衰...先是 宗室大解慕漱 密與須臾約 襲據故都白岳山 稱爲天王郞 四境之內 蓋爲聽命 於是 封諸將 陞須臾侯箕丕 爲番朝鮮王 往守上下雲障 蓋北夫餘之興始此 而高句麗 乃解慕漱之生鄕也 故亦稱高句麗也」桓檀古記 檀君世紀
그 후 오가(五加)가 함께 다스리기를 6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해모수(解慕漱)는 기사년(B.C 232년)에 오가(五加) 회유에 성공하여 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진한(辰韓)이 관할하던 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檀君)이 되었다. 이때 해모수가 전에 진한(辰韓)이 관할하던 지역만 장악한 것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번한(番韓)이 관할하던 지역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있었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마한(馬韓)이 관할하던 지역에는 독립세력으로 변한 마한(馬韓)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寶臧王) 27년조에 나오는 당(唐) 나라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의 답변에 의하면 가언충은 고구려가 건국된 해를 B.C 232년으로 보았다. 이 해는 해모수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檀君)이 된 해이다.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요동으로부터 돌아와 전황을 묻는 당제의 물음에 꼭 이깁니다..중략.."고구려의 비기에 '900년(해모수가 단군이 된 B.C 23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까지)이 채 못되어 80세 먹은 대장에게 멸망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씨가 한 시대로부터 나라를 지녀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 장군의 나이가 마침 80세입니다.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 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兄弟 爲我鄕導 虜之情僞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後略」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寶臧王 27年條
그 후 B.C 108년에 한(漢) 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다음해 요하(遼河) 동쪽 고구려(高九黎) 지역을 점령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자 동명(東明)이 일어나 한나라 군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세력을 얻어 B.C 86년에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를 수도(장춘 방면) 동쪽에 있는 가섭원(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여 북부여(北夫餘)라 칭하며 이때부터 동명계(東明系)가 2대 동안 고구려(高九黎 : 일명 북부여)를 통치하였다.
그 후 B.C 58년에 고구려(高九黎)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檀君)이 죽고 고주몽(高朱蒙)이 유언(遺言)에 따라 대통(大統)을 이었으나, 고구려(高九黎)를 장악하지 못하여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무리를 이끌고 졸본천(卒本川)으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고주몽)고구려는 고구려(高句麗)로, 길림(吉林) 방면의 동부여(東夫餘)와 장춘(長春) 방면의 북부여(北夫餘)는 부여(夫餘)로 각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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