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만난 빛나는 남성
박완서 (산문)
조카며느리가 요새 아기를 낳았다. 부모가 없는 조카로 내가 부모 대신한 아들과 같은 애정과 의무로 돌보았기 때문에 조카며느리의 순산 달엔 친딸이나 친며느리의 순산 달을 맞은 것처럼 기대와 불안으로 조마조마하게 지냈다.
누구의 진통이나 다 그런 것처럼 그녀의 진통도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고, 그녀는 미리부터 정기 진단을 받아오던 병원에 즉각 입원했다. 그러나 보통 초산부의 진통 시간을 훨씬 넘기고 나서도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처절한 인내도 그 한도를 넘긴것 같았다. 뭔가 잔뜩 불안해 있는 우리들 앞에 의사는 별안간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태중 아기의 호흡이 차츰 불규칙해지니 아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선 빨리 수술을 해야 하겠노라고,
요즈음은 대개 난산도 미리 예견하고, 진작 수술의 각오를 임부나 가족에게 갖게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이렇게 별안간 당한 수술은 당황스럽고 불길스럽기도했다. 그러나 생각하고 말 겨를이 없었다. 아기가 이 세상으로 통하는 좁은 산도에서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빨리 숨구멍을 터주는 일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수술실로 산모가 실려 들어간 지 불과 30분도 안되어 건강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모도 안전했다. 가족은 곧 미지의 나라에서 온 조그만 아기를 볼 수 있었다. 약간 피곤한 듯 약간 자랑스러운 듯"아들입니다"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은 무릎꿇고 싶게 위대해보였다.
그 위대함과 아기와 산모의 생명이 안전하다는 감격에 압도되어 아기가 아들이라는 것은 당장 가족들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다. 아기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감격만이 우리에겐 그렇게 크고 벅찼던 것이다. 그후 유리창 너머로 우리의 아기가 목욕하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기의 조그맣지만 순수하고 완벽한 남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거의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맛보았다.
그것은 확실히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다는 감동과는 별개의 새로운 감동이었다. 그것은 또 그 아기가 우리의 아기가 아닌 전혀 모르는 댁 아기였어도 맛볼 수 있는, 혈연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한 감동이면서도 벅찬 감동이었고 아낌없는 찬탄이었다. 왜 우리는 남성의 원형을 겨우 갖추었을 뿐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생명이 다만 남성이라는 걸로 이런 기쁨과 감동을 맛보았을까.
아직 용모의 미추도 정해지기 전이요, 자라면서 능력 있는 남성이 얻게 될 명예도 재산도 교양도 매력도 아무것도 아직 지니지않은 다만 순수한 남성일 뿐인 이 작은 생명이 왜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가. 거의 목구멍이 메일 것 같은 찬탄을 쥐어짜는 힘은 다만 그 생명이 남성이라는 데서 왔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두거니와 그 아기는 나의 조카의 아들이다. 고손이다. 나의 손을 잇는다든가 나의 제사를 맡는다든가. 덕을 본다든가 하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 아마 그때 내가 유리창 너머로 본 어린 남성이 내 조카의 아들이 아닌 딴 아기였어도 막 이 세상에 맞이한 새로운 손님이 남성이라는 것은 나에게 충분히 눈부셨을 것이다.
지나가던 소금장수도 아들 낳았다면 기뻐한다는 말이 있다.
"뭐 낳았어요?"
"아들이요"
"네 축하합니다"
과히 친하지 않은 이웃간의 이런 대화 속에도 섬광 같은 기쁨이 있다.
왜 우리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남성일 때 특별히 기뻐하는걸까. 오랜 남존여비의 전통에서 오는 감정의 타성일까? 남성에게는 사회적으로 여성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데서 오는 기대 때문일까? 그런 것도 이유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습이나 이해타산에 얽힌 기쁨이라기에는 너무도 순수하고 너무도 벅찬 무욕의 찬탄이었다.
모든 남성은 태어날 태부터 이런 빛나는 찬탄을 받고 태어난다. 웰까? 나름의 독단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까닭을 인류가 특별히 남성에게 거는 소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보다 적극적인 원동력이 남성에게 있다는 믿음 때문일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빚을 갚고 가는 남성은 많지 않다. 인류가 남성에게 거는 믿음은 차츰 미신화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낙망하기는커녕 새로이 세상에 오는 남성에게 새로운 믿음을 걸고 새로운 빚을 걸머지게 하려든다.
남성들은 부디 잊지말 것이다. 그가 얼마나 화려한 찬탄과 축복으로 이 세상에 영접되었던가를, 그가 무기력할 때마다, 나태할 때마다, 비굴할 때마다, 자포자기할 때마다 상기할 것이다. 그가 태어나면서 걸머진 찬탄의 빛을.
그러나 살다보면, 남성은 왜소해지고 무의미한 일상사는 태산처럼 압도해오리라, 인류의 이상을 실현시킨다는 일은 구름 잡는 일보다 더 허황한 전설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위대한 일의 일부구나 하고 자기의 남성을 전려투구할 만한 일과 만나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잊지말 것이다. 피곤한 몸을 앉지도 못하고 손잡이에 매달려 넝마처럼 흔들이는 출퇴근 버스 간에서 느닷없이 소매치기가 악한 여학생의 옆구리에 칼을 대고 위협할때, 그것을 본 척할 것이냐, 못 본 척할 것이냐를 망설이는 순간 잊지 말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다만 남성이라는 걸로 찬탄받고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그 엄청난 빚을 잊지 않고 상기할 때 그가 취할 행동은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남성얘기로 이 글의 끝을 맺겠다. 날이 급히 더워지기에 작년에 깊이 간직했던 여름 구두들을 꺼내보았다. 내 것과 아이들 것을 합해 대여섯 켤레쯤 되는 여름 구두 중에서 세 켤레는 암만해도 손을 보아야 신을 것 같았다.고리가 떨어진 것, 창을 갈아야 할 것 등.
나는 그 세켤레의 과히 깨끗지 못한 구두를 쇼핑백에 넣어가지고 우리 동네의 구두수선전문이라고 써 있는 조그만 가게를 찾아갔다. 주인이자 수선공인 남자는 젊었다. 나는 세 켤레의 구두를 꺼내 보이고 수선할 곳을 일러줬다. 수선공은 말없이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집에서 좀 닦아가지고 올걸, 구두는 너무 더러웠다. 나는 속으로 미안하면서도 수선공이 수선비에다 구두닦은 값까지 올려 받을 속셈이구나 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대강 닦으시죠"
그가 너무 열심히, 너무 깨끗이 구구를 닦는데 저항감을 느낀 나는 퉁명스럽게 이런 소리를 했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고집스럽게 구두를 유리같이 닦고 나서 수선을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돈을 위해 닦는게 아니라, 그의 결백성을 휘해 닦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모습엔 거의 기품에 가까운 결백성이 강력하게 부각돼 있었다. 그는 꼼꼼하게 뒤창을 갈고 고리를 달아주었다. 나는 천원짜리를 두어장 만지작거리며," 얼마예요?"하고 물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3백원 입니다." 했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나는 천원짜리를 내고 틀림없이 7백원을 거슬러 받았다. 나는 지금 그가 스스로 정한 저임금을 찬양할 생각도, 경멸할 생각도 없다. 그를 성자처럼 추켜세울 감상도 바보처럼 얕잡을 배짱도 없다.
다만 나는 그때 내가 받은 충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 나는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예리하게 나의 원고쓰는 일에 대한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나의 원고 한장의 값은 그의 구두 수선 세 켤레 값의 세배 내지 다섯 배가 된다. 그럼 나는 원고 한장으로 그의 구두 수선 세켤레 내지 다섯 켤레만큼의 이익을 남에게 주었을까.
또 과연 그의 세 배 내지 다섯 배의 성의로 한 장의 원고를 썼을까? 현재 우리의 노임 수준으로 과연 고료가 적다는 투정은 적당한가? 라는 소리없는 질책의 소리는 어느 독자의 어느 평자의 질책의 소리보다 신랄하고 가혹했다.
물론 정신적 작업의 대가와 육체적 작업의 대가는 다르다는 도피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적 작업이라고 해서 무해무익한 또는 유해한 작업까지도 육체적 작업보다 대우받아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당분간 내가 만난 구두 수선공이 나에게 준 가혹한 질책 속에서 나의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당분간이 아니라 나에게 원고 쓰는 일이 계속되는 한 나는 그 질책을 감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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