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머슴과 미국 머슴
평안북도 정주에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눈에는 총기가 있었고, 동작이 빠르고, 총명한 청년이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했다.
그는 아침이면 주인의 방에서 오줌을 받아 놓은 요강을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려 다시 안방에 들여놓았다.
주인은 이 청년의 이런 행동을 보고 머슴으로 두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고 그 청년을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시켜 주었다.
공부를 마친 청년은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요강을 씻어 숭실대학에 간 그가 민족의 유명한 독립 운동가
조만식 선생님이다.
후에 사람들이 물었다.
"머슴이 어떻게 대학에 가고, 선생님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었나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인의 요강을 정성 들여 씻는 정성을 보여라.”
남의 요강을 닦는 겸손과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아량
그것이 조만식 선생님을 낳게 했다.
조만식 曺晩植
요약 한국 정치가 겸 독립 운동가.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했다.
출생-사망
1883.2.1 ∼ 1950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평남 강서(江西)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0)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직하고 3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關西)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이 발발한 뒤 퇴각하는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북한 내무성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살해된 날짜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15일이라는 설과
1950년 10월 18일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미국에 남북 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에 미, 오하이오 주의 대농
부호인 테일러(Worthy Tailor) 씨 농장에
한 거지 소년이 굴러들었는데 17 살의 짐이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이 집에서는 그를 머슴으로 고용했는데
3 년 뒤, 자기의 외동딸과 짐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 테일러씨는 몹시 노하여 짐을 때리고
빈손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후, 35 년이 지나 테일러씨가 낡은 창고를 헐다가
짐의 보따리를 발견했는데 한 권의 책 속에서 쓰여진
그의 본 명을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의 20번째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James A. Garfield)
그 이름을 알게 되자 테일러씨는 큰 충격에 빠졌는데
그는 당시 미국 현직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테일러씨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난 James A. Garfield 가필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육군 소장을 거쳐 여덟 번이나 하원 의원에 피선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어 당당히 백악관을 차지한 것거였습니다.
출생 및 임기
제임스 A. 가필드(James A. Garfield)는 1831년 11월 19일에
오하이오주 엘모어(East Orange)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1881년부터 1881년 9월 19일까지였지만,
불행히도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약 200일만에
암살로 인해 종결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 된지 얼마 안돼 총재로서의 짧은 기간 동안
미국을 이끌었으며, 이후 암살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업적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의 주요한 업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국 재정 개혁: 가필드 대통령은 미국의 재정을 개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국가 재정을
관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공공부패와의 싸움: 그는 공공부패와의 싸움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노동자 권리 지원: 가필드 대통령은 노동자의 권리와 조건 개선을
지지했으며, 그들의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교육정책 강화: 그는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 교육정책을 강화하고
미국의 교육체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외교적 활동: 그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미국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대통령으로서의 임기가 너무 짧아
실제로 외교적 업적은 크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암살로 죽음을 맞은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입니다.
그의 짧은 임기 동안에도 공공부패와의 싸움, 재정 개혁, 교육 강화,
노동자 권리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너무 짧았고, 암살로 인해 이루고자 했던
많은 목표들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필드 대통령은 미국 역사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리더십으로 기억되며,
그의 죽음은 미국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내용보다는 외모를 통해서 사람을 평가한다.
누구나 다 눈을 가지고 있지만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되새기며 다른 사람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보고
평가 할 줄 아는 지혜자가 되야 겠습니다.
'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산주의 국가는... (0) | 2024.07.02 |
---|---|
6.25를 잊지 맙시다 (0) | 2024.06.25 |
나...!!!!! (0) | 2024.05.14 |
행복이란 (0) | 2024.05.13 |
사진 한 장 (0) | 2024.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