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백제_온조왕 마한병합고(考)

봉서방 2023. 7. 24. 21:4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마한은 #온조왕 27년(서기9년)에 백제에게 병합된 것으로 나온다.
백제가 건국된지 27년만에 어떻게 강대한 마한을 병합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그러나 기사를 깊이 음미하다보면 건국 초기라 하더라도 병합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서노를 대표로 하는 백제건국세력이 지금의 서울지역에 출현 하자 마한왕은 그들에게 백리의 땅을 떼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마한왕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된 "후기진국(=한국)"을 주도하던 월지국 진왕을 가리킨다. 전기진국은 한때 요동에 있던 진한이 주도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갑자기 나타난 이주민에게 아무런 댓가도 없이 영토를 할양하여 주는 등 선의를 베푸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어느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이익을 우선시 하는 국제관계에 있어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한왕이 백제 건국세력을 자신의 영토로 들일 수 밖에 없었던 전후 사정이 있었을터이다. 알다싶이 소서노집단은 부여-고구려 유이민으로써 기마술에 능한 집단이였고 부여의 선진문화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경영했던 정치력과 문화적 역량을 보유한 세력들이었다. 이에 마한왕은 그들을 압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정도 타협점을 찾아 그들을 회유하려 했을 터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위만의 경우가 참고된다. 위만은 연.제.조의 유이민들과 함께 발조선의 서쪽 변경으로 들어왔고 세를 규합하자 당시 준왕은 그들을 내쫓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위만에게 백리의 땅을 떼주고 제후로 삼아 발조선의 서계를 지키는 번병으로 삼았다. 그러나 위만은 어느 정도 실력이 갖추어지자 속임수를 통해 발조선의 준왕을 습격하여 나라를 탈취하게 된다.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위만이 발조선의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다면 소서노집단도 능히 마한의 중심 거점을 타격하여 병합으로 이끌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도에 아리안인들은 찬란하던 인더스문명을 하루아침에 멸망시켰고, 소수의 스페인 선원들에 의해  강대한 잉카제국이 정복 당한 사례도 참고가 된다. 
단순히 현대 역사가의 주관적인 선입견에 함몰되어 백제 건국세력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며 건국초기에는 마한을 절대로 병합할 수 없다면서 1차사료마져 무시하는 행태는 실증을 운운하는 역사가의 바른 자세가 아닐터이다. 
소서노집단이 정착 초반에는 마한의 진왕에게 통속되어 천도 사실을 알리고 조공을 바치는 등 마한의 한 일원으로써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변 지역들을 회유하며 연합하거나 정벌 등을 통해 치밀하게 마한 북경을 잠식해 들어갔을 것이다.  
왕모 소서노가 "오호정변" 과정에서 붕어하고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후에 확정된 영역을 보면 백제의 강역이 대단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부지역의 재지세력들과 연합하거나 정복한 결과이다.
〔13년(B.C. 6)〕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遷都]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여기서 남계의 "웅천"이라는 지명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데 웅천은 웅진성이 위치한 지금의 금강으로 이해된다. 
*학계에선 웅천을 안성천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많으나 웅진에 몽진해 있던 의자왕을 생포하여 당에 투항한 민족반역자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그를 웅천인출신이라고 소개한다. 당시 예식진은 웅진성 방령이였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 양광도에는 웅진도독부를 고쳐 신문왕때 웅천으로했다고 하는데 당의 관청을 폐지하고 웅진의 별칭인 웅천으로 환원한 것으로 이해된다. 
 온조왕 24년(서기6년)쯤에는 백제의 세력권이 금강이북까지 이르고, 마한의 반격을 제어하고자 웅천책이라는 방어벽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 마한왕의 강경한 항의를 받고 백제는 전략적으로 제국(諸國)의 여론을 의식하며 제간(諸干, 길지)들의 환심을 살 요량으로 순응하는척 철거를 하게 된다.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온조왕은 한해 뒤에 상서로운 천기를 내세워 마한제국 내의 여론을 백제쪽으로 끌어오면서 마침내 마한과 진한(=신라)을 병탄하여 삼한의 진왕이 될 꿈을 품게 되었다. 그만큼 백제의 국력이 신장되고 분위기가 성숙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상징조작을 통한 여론전도 한몫했을터이다. 
'25년(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漢城)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자(日者)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께서 우뚝 일어날 조짐이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병탄할 마음을 가졌다.'
이에 온조왕은 마한이 내분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마한왕의 치소인 월지국을 정복하여 항복받게 된다. 
'〔26년(8)〕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을 간다고 말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온조왕26년(서기8년)에 마한왕의 "국읍"을 병합하고 한해 뒤 원산성과 금현성으로 피신해 있던  마한왕의 잔존세력을 사로잡으면서 드디어 월지국 진왕이 주도하던 마한이 멸망한 것이었다. 
'27년(9) 여름 4월에 두 성[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였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당시 마한은 중앙집권국가가 아니였다. 일종의 느슨한 연방국행태였던 것이다. 서의식교수(서울대 역사교육학과)는 이것을 진국체제의 이중용립구조로 설명했다. 
마한의 진왕은 국(國)들의 여러 칸들이 모여 옹립한 왕이였고 그 진왕에게 여러 칸들이 통속해 있는 체제였다. 국들 위에 상위의 또다른 국가가 씌워져 있는 행태였던 것이다. 국들 위에 권역별로 세개의 칸국이 있고 그 칸국 위해 총왕의 역할을 하는 진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로 인해 백제의 온조왕이 마한의 주도국을 병탄하여 실력을 보이자 마한에 속한 국들이 백제에게 복속해 들어왔던 것이다. 온조왕이 마한의 진왕위에 오름으로써 서기9년에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반발하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이내 진압되게 된다. 
34년(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백제 후기의 사료이긴 하지만 일본의 오우치가문의 족보에는 위덕왕을 가리켜 "백제국마한황제제왕"이라는 표현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백제왕이 마한의 진왕 즉 마한황제를 겸하였음을 보여준다. 
백제왕은 마한의 진왕이요. 진국(=한국)의 총왕이라는 관념은 백제가 붕괴되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백제 후기부터 백제대왕을 황제로 칭하게 되고, 이러한 백제국 마한황제라는 의식은 백제로 하여금 신라처럼 삼한일통의 비전을 가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진한6국의 칸들이 혁거세를 거서간(=진왕)으로 옹립하여 세워졌던 것처럼 백제도  중부지역의 여러 칸(=길지)들이 소서노와 온조왕을 "건길지"로 인정하면서 세워졌다. 서기9년에 마한의 월지국을 병합하면서 명실상부한 마한의 진왕으로 등극하여 삼한의 총왕이라는 위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3세기 고이왕때 이거나 4세기 근초고왕때에 이르러 차츰 백제국왕 아래로 국들의 지배층은 백제의 귀족들이 되고 국들의 하호층들은 백제국왕의  제민(=일반백성)으로 편제되어 나가면서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했던 것이다. 
영산강일대 재지세력의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백제에 병합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배층들이 정치적으로는 백제왕의 통속하에 놓여있었지만 그 아래 피지배민들은 여전히 그 국들의 수장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 다른 지역보다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성백제 금동관이 전남 나주와 고흥에서 출토된 바 있고 사비기 은꽃장식이 남원과 나주에서도 나왔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기9년 온조왕때 마한멸망은 마한의 주도국인 월지국을 병합함으로 일단 월지국 중심의 마한체제가 백제국 중심의 마한체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성백제 금동관 출토지, '백제국 마한황제'가 국내 담로 후왕들에게 금동관을 하사하여 지방을 통치했던 물적 근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