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고구려, 금, 청의 뿌리는 카자흐스탄

봉서방 2021. 2. 11. 21:11

금·청의 황제가 신라인들이며 한민족의 형제라면. 또 부여·고구려·징기스칸이 2000년 전 알타이 국가 

‘고리(까오리)’의 혈맥을 공유한다면 이를 믿을 것인가.(1)

 역사는 이웃 민족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다(구술 포함) 한 때는 약자였다가 한 때는 강자로
돌아서 이웃을 통치하고 통치 받기도 하던 때,
그 기록들을 들여다 보면서 강자의 위세함과 약자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약자의 자존심을 숨기고 강자의 위대함을
애써 과장, 강조하는게 현실임을 감안 한다면
위 서문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금.청의 황제는 신라인들이라는 미스터리는
'한국사 미스터리'에서 익히 참고 하였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일까?
물론 부여라고 답을 내어 놓아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원천적 물음은
그보다 훨씬 이전을 묻는 것이기에 틀린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원의 뿌리는 "高離國"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대쥬신을 찾아서" 저자인 김운회 동양대 교수이다.
이 분이 말하는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 탐험에 동참하는 재미도 쏠쏠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고구려의 뿌리는 현재 카자흐스탄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은 몽골계의 시작인 동시에 언어 문화적으로 우리와 많은 친숙함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카자흐스탄 동북부,  벨루하산(4506m) 정상에서 자락처럼 펼쳐지는 산맥.

 한민족 원형질의 고향인 "알타이"라고 그는 주저없이 주장하는
이유 역시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아래는 그가 주장하는 고구려 뿌리의 미스터리 내용이다.

 

카자흐·한국의 관계가 깊다지만 실체가 없지 않나.

“알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시간을 건너뛰는 두 개 단어를 살펴보자.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과 카자흐의 수도 ‘아스타나’라는 이름이다.

아사·아스는 ‘불 붙는, 타오르는’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아스(as)에서,

 달·타나는 ‘얕은 언덕이나 넓은 초원’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탈라(tala)’에서 왔다.

 달은 양달·응달이란 우리말에 살아 있다.

‘황홀한 평원’ ‘고요히 밝아오는 초원’이란 뜻도 되는 아스탈라(As-tala)가 

아스달과 아스타나에 살아 있는 것이다. 뿌리에 대한 중요한 시사가 아닌가.”

단어 하나에 의미 부여가 너무 커 보인다. 그보다 역사적 기록이 있나.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양서 삼국사기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辰韓·한반도 남부 삼한의 하나)’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길 

자기 선조는 진(秦·진시황의 진)나라 부역을 피해 왔는데 마한이 동쪽 국경 땅을 떼 주었다’고 돼 있다.

양서에도 ‘신라의 선조는 진(秦)사람’이라고 썼다. 

삼국지에는 ‘진나라에서 난리가 나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과 잡거했다’고 했다. 

알타이인 지금의 카자흐와 과거 진나라의 서부 지역에 걸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진나라를 피해 이동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진시황이 한민족 뿌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의 통치 범위는 현대 카자흐까지 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이 그처럼 중국 서북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족 사가들은 진나라를 오랑캐 즉, 흉노

 혹은 서융으로 기록할 정도다. 이후 한무제의 북방 공격도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류학적 증거도 있나.

“민족 기원과 계통을 알 수 있는 두개골 조사가 있다. 2001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고기석 교수는

 ‘한국과 가장 닮은 이들은 카자흐 민족’이란 연구 결과를 내놨다. 머리뼈의 봉합선, 두개골 하부의 구멍 등

 60여 개 항목을 조사했는데 ‘한국·카자흐 민족의 두개골 구조가 가장 닮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까운 유형은 중동부 지역의 오르타족 카자흐인이다. 그곳이 알타이다. 

어떤 카자흐 부족은 스스로를 케레이라 부른다.

편두도 있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 두개골과 신라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편두란 이마가 인위적으로 눌리고 머리 주위로 고랑 같은 주름이 둘러 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두개골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 사람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 편두를 한다’고 썼다.

학계에 따르면 편두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흉노의 자취’처럼 나타난다

. 흉노는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고 했다. 

왜 흉노와 만주족의 편두가 신라에도 나타나는가. 신라가 흉노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흉노라니 놀라운 일인데 증거는.?

“신라 문무왕의 능비에 ‘내 선조는 김일제’라고 써 있다.

 김일제는 누구인가. 중국 한무제는 흉노를 공략하면서 흉노의 한 나라인 휴도국 왕을 죽이고 아들을 잡아온다.

이 아들을 무제가 총애해서 김씨 성과 일제라는 이름을 준다. 한서(漢書)의 기록이다.

 그런데 한은 왕망의 신(新)나라에 망하는데 15년 뒤 신은 망하고 왕망은 역적이 된다.

이 왕망이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의 이모부다. 왕망의 외가였던 김일제 후손은 달아나야 했다. 

그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피신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휴도국 옛 땅의 비석으로도 확인된다.”

지금까지는 신라와 흉노의 연관성인데 나머지 한민족과의 연관성도 있나.

“한반도엔 동남 아시아와 중국 해안 지역을 거쳐 온 사람(남방계)이 벼농사와 함께 먼저 정착했다. 북방계인 알타이로부터의 이동은 그 뒤다. 제1 경로인 ‘알타이-초원길-몽골―북만주―한반도’와 

제2 경로인 ‘알타이-중국 북부-산둥―요동―한반도’ 두 길로 왔다고 추정된다. 북방과 남방계 비율이 7대 3이다.”

제1 경로 이동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나.

“기록은 까오리(gaoli)라는 단어와 관계 있다.

 북방 출신 한민족의 고대 명칭으로 ‘쥬신·까오리’가 있다. 까오리가 더 일관성이 있고 변화 과정이 정확하다.

‘골짜기·마을을 뜻하는 골’에서 나온 까오리는 코리, 꼬레, 카레이로 변하며 코리어로 굳어갔다.

 까오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은 삼국지 위략이다. 

‘부여는 북방의 고리(高離·몽고 발음 까오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고 한 북사까지 종합하면 고리는 ‘한반도의 뿌리 국가’가 된다.

고리는 탁리, 삭리, 콜리, 고려, 구려 등으로 변형되지만 모든 발음은 까오리로 수렴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고려를 까우리(Cauli)로 썼다.”

고리와 알타이는 어떻게 연결되나.

“삼국지에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까오리국 금와왕(金蛙王)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돼 있다.

 몽골의 대표적 사학자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금와왕의 까오리는 고리국이며 

이 부족은 8 세기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한다’고 했다.

또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금와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즉 금와왕-까오리-부여로 이어지면서 알타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알타이 거주 민족도 흉노라 불렀다.

한서는 ‘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면서 ‘흉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도 흉노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흉노란 뜻이 무엇인가.

중국은 왜 다양한 북방 민족을 흉노라고 불렀나.

“흉노를 옛날 현지 유목민 발음대로 하면 슌누(shunnu) 즉, ‘천손족(태양의 아들)’이라는 좋은 뜻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렀다.

 그런데 중국 사가들이 ‘입심 좋은 노예’라는 나쁜 뜻을 담은 한자로 음차했다.

카자흐에도 흉노를 ‘훙드스’ ‘궁드스’라고 하는데 태양 또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천손족에 대한 기억은 한국의 단군·동명·해모수 신화, 만주·거란족의 천녀 신화, 몽골의 알랑고아 신화,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화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요컨대 흉노는 알타이 산맥 동남쪽에 살았던 유목민의 포괄적 총칭이다. 

이들은 몽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동해가며 나라를 만들었다. 

서쪽에선 유럽사를 뒤집었다. 집합체의 핵심 지배집단이 전체 부족들을 이끌었다.

흉노가 북아시아를 제패하자 모든 유목민들은 ‘우리는 흉노’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우리는 모두 선비’라고 했다. 칭기즈칸 때는 ‘우리는 몽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뿌리로 ‘쥬신’이란 생소한 단어를 쓰나. 

한민족은 중국 사서에 동이·예맥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지 않나.

“쥬신은 중국 사가들이 동이족에 대해 붙였던 명칭들의 대표 발음이다. 

그들은 만리장성 동북방 민족을 조선, 숙신, 여진, 주신 등으로 불렀다. 모두 쥬신과 유사하게 발음된다.

만주실록에 쥬선구룬(Jusen Gurun)이라는 말이 있는데 ‘쥬신의 나라’라는 뜻이다. 

쥬신이란 용어를 가장 오래 쓴 민족은 만주족과 한국인이다. 한반도는 조선이란 국호로,

 청나라는 초기 공식명으로 ‘대쥬신제국(Yeke Jusin Ulus)’을 썼다. 

한자로 대제신제국, 대조선제국, 대숙신제국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쥬신 가운데 고구려-고려-조선으로 내려온 한민족만 남았다는 말인데 나머지는 어떻게 됐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대표가 금(金)·청(淸)이다. 금은 신라인이 건국했다. 

금사에 ‘우리 선조는 고려에 살던 신라인 김함보(金函普)’라고 써 있다.

금 태조는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었으며 거란을 대국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공손히 하였다’ 는

 문서도 고려에 보냈다. 청은 금을 계승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황족들은 신라에서 왔으며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은 함경도 종성-중국 옌벤·룽징(龍井) 지역이다.
몽골의 원도 있다.

칭기즈칸의 몽골 건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나오는 얘기다. 

원 건국신화의 시조모 알랑고아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유화 부인과 같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말로 고주몽이란 뜻이다.

칭기즈칸이 금나라 황제 알탄 칸의 청으로 타타르를 정벌한 뒤 받은 작호가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이다. 

몽골 할흐골솜 설화엔 ‘고리(코리)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으로 가 고구려 칸이 됐다’는 게 몽골에선 정설로 통한다.

즉 ‘고리’라는 한 뿌리에서 한반도에는 부여·고구려가, 만주·요동에선 금·청·원이 나왔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옛날 동으로 가 부여·고구려의 뿌리가 됐다.

몽골·부리야트 모두 몽골족이다. 고조선을 계승한 거란족의 요나라도 있다. 

요사(遼史)에는 ‘요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한국 사학계가 다루지 않는 이런 엄청난 유목 민족의 역사가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나.

“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사상이 된 뒤 한국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사상·역사를 지배했다.

 이를 시정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한족과 한국인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은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응 못한다. 한민족 역사에서 사라진 만주와 북방 초원지대를 돌아봐야 한다. 

알타이는 그래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태양의 아들인 슌누는 유럽-중앙아시아-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중개무역을 주관했고 금속의 제조와 가공에 능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의 소유자이자 무역업자였다. 

세계 역사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해본 경험이 가장 많은 DNA가 우리가 공유하는 슌누 DNA다. 

우리는 잃어버린 그 역사와 DNA를 되찾아야 한다. 

그 힘찬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2)


역사를 되돌아 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것은 사서를 기초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족 할 때에는 고고학적 결과를 토대로 인류학적으로
접근 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는 가야와 남부 소국들의 형성과정을 유추해 내는데
사용하여 유익한 결과를 내어 놓은 방법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다.


김운회 교수는 인류학적 측면에서 몽골인들의 이동경로를 유추, 추적하여 문화의 선후 경로를 

근거로 고구려의 뿌리를 결론 낸 것이다.

역사는 강자의 편에선 야누스라고 하였다.
고구려만이 우리의 직계국이라는 고집만으로는 아시아의 역사 강국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현실적 정치논리로
남한과 국한의 서로다른 직계국이 되었지만
그 사이 버려지다시피 남겨진 백제와 가야 소국들의 역사 역시
존중 되어야 한다.

그들 역시 현재 우리의 직계국임을 감안한다면
최후 승자의 몫인 역사 논리는 비 현실적 감성적일 뿐 더이상의
뿌리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대쥬신을 찾아서의 저자의 논리를 실어 본것이다.
위 글은 가설의 한 부분이지만 우리가 역사 찾기에서 무시 할 수
없는 부분들도 상당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갈무리 해 놓는다면
어느날 나에게 찾아온 뿌리 찾기의 실가닥을 우연히 흘러 보지
않을 것이다. (끝)

(2)중앙일보에 실린 대담 내용 중에서
v금·청의 황제가 신라인들이며 한민족의 형제라면.

 또 부여·고구려·징기스칸이 2000년 전 알타이 국가 ‘고리(까오리)’의 혈맥을 공유한다면 이를 믿을 것인가.(1)

 역사는 이웃 민족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다(구술 포함) 한 때는 약자였다가 한 때는 강자로
돌아서 이웃을 통치하고 통치 받기도 하던 때,
그 기록들을 들여다 보면서 강자의 위세함과 약자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약자의 자존심을 숨기고 강자의 위대함을
애써 과장, 강조하는게 현실임을 감안 한다면
위 서문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금.청의 황제는 신라인들이라는 미스터리는
'한국사 미스터리'에서 익히 참고 하였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일까?
물론 부여라고 답을 내어 놓아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원천적 물음은
그보다 훨씬 이전을 묻는 것이기에 틀린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원의 뿌리는 "高離國"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대쥬신을 찾아서" 저자인 김운회 동양대 교수이다.
이 분이 말하는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 탐험에 동참하는 재미도 쏠쏠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고구려의 뿌리는 현재 카자흐스탄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은 몽골계의 시작인 동시에 언어 문화적으로 우리와 많은 친숙함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카자흐스탄 동북부,  벨루하산(4506m) 정상에서 자락처럼 펼쳐지는 산맥. 

한민족 원형질의 고향인 "알타이"라고 그는 주저없이 주장하는
이유 역시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아래는 그가 주장하는 고구려 뿌리의 미스터리 내용이다.

 

카자흐·한국의 관계가 깊다지만 실체가 없지 않나.

“알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시간을 건너뛰는 두 개 단어를 살펴보자.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과 카자흐의 수도 ‘아스타나’라는 이름이다.

아사·아스는 ‘불 붙는, 타오르는’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아스(as)에서, 

달·타나는 ‘얕은 언덕이나 넓은 초원’이란 뜻의 원시 알타이어 ‘탈라(tala)’에서 왔다. 

달은 양달·응달이란 우리말에 살아 있다.

‘황홀한 평원’ ‘고요히 밝아오는 초원’이란 뜻도 되는 아스탈라(As-tala)가 아스달과 아스타나에 살아 있는 것이다.

 뿌리에 대한 중요한 시사가 아닌가.”

단어 하나에 의미 부여가 너무 커 보인다. 그보다 역사적 기록이 있나.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양서 삼국사기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辰韓·한반도 남부 삼한의 하나)’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길 

자기 선조는 진(秦·진시황의 진)나라 부역을 피해 왔는데 마한이 동쪽 국경 땅을 떼 주었다’고 돼 있다.

양서에도 ‘신라의 선조는 진(秦)사람’이라고 썼다.

 삼국지에는 ‘진나라에서 난리가 나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과 잡거했다’고 했다. 

알타이인 지금의 카자흐와 과거 진나라의 서부 지역에 걸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진나라를 피해 이동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진시황이 한민족 뿌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의 통치 범위는 현대 카자흐까지 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이 그처럼 중국 서북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족 사가들은 진나라를 오랑캐 즉, 흉노 혹은 서융으로 기록할 정도다. 

이후 한무제의 북방 공격도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류학적 증거도 있나.

“민족 기원과 계통을 알 수 있는 두개골 조사가 있다. 

2001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고기석 교수는 ‘한국과 가장 닮은 이들은 카자흐 민족’이란 연구 결과를 내놨다.

 머리뼈의 봉합선, 두개골 하부의 구멍 등 60여 개 항목을 조사했는데 

‘한국·카자흐 민족의 두개골 구조가 가장 닮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까운 유형은 중동부 지역의 오르타족 카자흐인이다. 

그곳이 알타이다. 

어떤 카자흐 부족은 스스로를 케레이라 부른다.

편두도 있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 두개골과 신라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편두란 이마가 인위적으로 눌리고 머리 주위로 고랑 같은 주름이 둘러 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두개골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 사람은 머리를 납작하게 눌러 편두를 한다’고 썼다.

학계에 따르면 편두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흉노의 자취’처럼 나타난다.

 흉노는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고 했다. 

왜 흉노와 만주족의 편두가 신라에도 나타나는가. 신라가 흉노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흉노라니 놀라운 일인데 증거는.?

“신라 문무왕의 능비에 ‘내 선조는 김일제’라고 써 있다. 

김일제는 누구인가.

 중국 한무제는 흉노를 공략하면서 흉노의 한 나라인 휴도국 왕을 죽이고 아들을 잡아온다.

이 아들을 무제가 총애해서 김씨 성과 일제라는 이름을 준다. 

한서(漢書)의 기록이다. 

그런데 한은 왕망의 신(新)나라에 망하는데 15년 뒤 신은 망하고 왕망은 역적이 된다.

이 왕망이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의 이모부다. 

왕망의 외가였던 김일제 후손은 달아나야 했다. 

그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피신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휴도국 옛 땅의 비석으로도 확인된다.”

지금까지는 신라와 흉노의 연관성인데 나머지 한민족과의 연관성도 있나.

“한반도엔 동남 아시아와 중국 해안 지역을 거쳐 온 사람(남방계)이 벼농사와 함께 먼저 정착했다.

 북방계인 알타이로부터의 이동은 그 뒤다. 

제1 경로인 ‘알타이-초원길-몽골―북만주―한반도’와 제2 경로인

 ‘알타이-중국 북부-산둥―요동―한반도’ 두 길로 왔다고 추정된다. 북방과 남방계 비율이 7대 3이다.”

제1 경로 이동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나.

“기록은 까오리(gaoli)라는 단어와 관계 있다. 

북방 출신 한민족의 고대 명칭으로 ‘쥬신·까오리’가 있다. 

까오리가 더 일관성이 있고 변화 과정이 정확하다.

‘골짜기·마을을 뜻하는 골’에서 나온 까오리는 코리, 꼬레, 카레이로 변하며 코리어로 굳어갔다. 

까오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은 삼국지 위략이다.

 ‘부여는 북방의 고리(高離·몽고 발음 까오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고 한 북사까지 종합하면 

고리는 ‘한반도의 뿌리 국가’가 된다.

고리는 탁리, 삭리, 콜리, 고려, 구려 등으로 변형되지만 모든 발음은 까오리로 수렴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고려를 까우리(Cauli)로 썼다.”

고리와 알타이는 어떻게 연결되나.

“삼국지에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은 까오리국 금와왕(金蛙王)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돼 있다.

 몽골의 대표적 사학자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금와왕의 까오리는 고리국이며

 이 부족은 8 세기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한다’고 했다.

또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에 따르면 금와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즉 금와왕-까오리-부여로 이어지면서 알타이는 한민족의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알타이 거주 민족도 흉노라 불렀다.

한서는 ‘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면서 ‘흉노를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도 흉노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흉노란 뜻이 무엇인가.
중국은 왜 다양한 북방 민족을 흉노라고 불렀나.

“흉노를 옛날 현지 유목민 발음대로 하면 슌누(shunnu) 즉, ‘천손족(태양의 아들)’이라는 좋은 뜻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렀다. 

그런데 중국 사가들이 ‘입심 좋은 노예’라는 나쁜 뜻을 담은 한자로 음차했다.

카자흐에도 흉노를 ‘훙드스’ ‘궁드스’라고 하는데 태양 또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천손족에 대한 기억은 한국의 단군·동명·해모수 신화, 

만주·거란족의 천녀 신화, 몽골의 알랑고아 신화,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화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요컨대 흉노는 알타이 산맥 동남쪽에 살았던 유목민의 포괄적 총칭이다.

 이들은 몽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동해가며 나라를 만들었다. 

서쪽에선 유럽사를 뒤집었다. 

집합체의 핵심 지배집단이 전체 부족들을 이끌었다.

흉노가 북아시아를 제패하자 모든 유목민들은 ‘우리는 흉노’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우리는 모두 선비’라고 했다. 

칭기즈칸 때는 ‘우리는 몽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뿌리로 ‘쥬신’이란 생소한 단어를 쓰나.

 한민족은 중국 사서에 동이·예맥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지 않나.

“쥬신은 중국 사가들이 동이족에 대해 붙였던 명칭들의 대표 발음이다. 

그들은 만리장성 동북방 민족을 조선, 숙신, 여진, 주신 등으로 불렀다.

 모두 쥬신과 유사하게 발음된다.

만주실록에 쥬선구룬(Jusen Gurun)이라는 말이 있는데 ‘쥬신의 나라’라는 뜻이다.

 쥬신이란 용어를 가장 오래 쓴 민족은 만주족과 한국인이다.

 한반도는 조선이란 국호로, 청나라는 초기 공식명으로 ‘대쥬신제국(Yeke Jusin Ulus)’을 썼다. 

한자로 대제신제국, 대조선제국, 대숙신제국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쥬신 가운데 고구려-고려-조선으로 내려온 한민족만 남았다는 말인데 나머지는 어떻게 됐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대표가 금(金)·청(淸)이다. 금은 신라인이 건국했다. 

금사에 ‘우리 선조는 고려에 살던 신라인 김함보(金函普)’라고 써 있다.

금 태조는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었으며

 거란을 대국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공손히 하였다’ 는 문서도 고려에 보냈다. 

청은 금을 계승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황족들은 신라에서 왔으며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고향은 함경도 종성-중국 옌벤·룽징(龍井) 지역이다.

몽골의 원도 있다.

칭기즈칸의 몽골 건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나오는 얘기다.

 원 건국신화의 시조모 알랑고아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유화 부인과 같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말로 고주몽이란 뜻이다.

칭기즈칸이 금나라 황제 알탄 칸의 청으로 타타르를 정벌한 뒤 받은 작호가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이다. 

몽골 할흐골솜 설화엔 ‘고리(코리)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으로 가 고구려 칸이 됐다’는 게 몽골에선 정설로 통한다.

즉 ‘고리’라는 한 뿌리에서 한반도에는 부여·고구려가, 만주·요동에선 금·청·원이 나왔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옛날 동으로 가 부여·고구려의 뿌리가 됐다.

몽골·부리야트 모두 몽골족이다. 고조선을 계승한 거란족의 요나라도 있다. 

요사(遼史)에는 ‘요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한국 사학계가 다루지 않는 이런 엄청난 유목 민족의 역사가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나.

“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사상이 된 뒤 한국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사상·역사를 지배했다.

 이를 시정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한족과 한국인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은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응 못한다. 한민족 역사에서

 사라진 만주와 북방 초원지대를 돌아봐야 한다. 알타이는 그래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태양의 아들인 슌누는 유럽-중앙아시아-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중개무역을 주관했고 금속의 제조와 가공에 능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의 소유자이자 무역업자였다. 

세계 역사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해본 경험이 가장 많은 DNA가 우리가 공유하는 슌누 DNA다. 

우리는 잃어버린 그 역사와 DNA를 되찾아야 한다. 그 힘찬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2)


역사를 되돌아 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것은 사서를 기초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족 할 때에는 고고학적 결과를 토대로 인류학적으로
접근 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는 가야와 남부 소국들의 형성과정을 유추해 내는데
사용하여 유익한 결과를 내어 놓은 방법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다.
김운회 교수는 인류학적 측면에서 몽골인들의 이동경로를 유추, 추적하여 

문화의 선후 경로를 근거로 고구려의 뿌리를 결론 낸 것이다.

역사는 강자의 편에선 야누스라고 하였다.
고구려만이 우리의 직계국이라는 고집만으로는 아시아의 역사 강국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현실적 정치논리로
남한과 국한의 서로다른 직계국이 되었지만
그 사이 버려지다시피 남겨진 백제와 가야 소국들의 역사 역시
존중 되어야 한다.

그들 역시 현재 우리의 직계국임을 감안한다면
최후 승자의 몫인 역사 논리는 비 현실적 감성적일 뿐 더이상의
뿌리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대쥬신을 찾아서의 저자의 논리를 실어 본것이다.
위 글은 가설의 한 부분이지만 우리가 역사 찾기에서 무시 할 수
없는 부분들도 상당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갈무리 해 놓는다면
어느날 나에게 찾아온 뿌리 찾기의 실가닥을 우연히 흘러 보지
않을 것이다. (끝)

(2)중앙일보에 실린 대담 내용 중에서

 



[출처] 고구려.금.청의 뿌리는 카자흐스탄|작성자 솔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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