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격투기, 각저(角抵)
유도(柔道)는 12세기 무렵부터 일본의 무가(武家)에서 내려오던 것을 1882년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郞)가 현재의 형태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도·레슬링·씨름 등 동양 격투기의 원형은 그 훨씬 전에 있었던 각저(角抵)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사(李斯)열전에는 "이때 진(秦)나라 이세(二世) 황제가 감천(甘泉)에서 배우(優俳)들의 곡저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응소(應召力)는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전국(戰國)시대에 있었던 '무술시범(講武之禮)'이 진나라에서 각저(角抵)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부여조에는 "후한 순제(順帝:서기 136년) 때 부여 국왕이 방문하자 각저희를 관람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대 중국에도 각저가 성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는 두 역사(力士)가 씨름하는 각저총(角抵塚) 벽화가 있다. 두 역사 곁의 큰 나무 밑둥에 곰과 범이 등장하는 데 이는 고구려인들이 단군 사적(史籍)의 주요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각저의 기원이 단군시대까지 올라감을 시사하는 것이다. 중국 고대 양(梁)나라의 임방(任昉)이 편찬한 '술이기(述異記)'에는 상고시대의 치우(蚩尤)민족이 황제(黃帝)와 싸울 때 머리 위에 뿔(角)을 달아서 '각저인(角抵人)'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치우는 곧 동이족의 원류이니 각저의 시작이 동이족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려 사람들의 글을 많이 수록한 '동문선'에 각저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은 것은 고려가 각저 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지는데,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일본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을 각저(角抵)로 당해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꼭 각저를 보고자 했다. 세종 8년(1426)에 조선에 온 명 사신들은 목멱산(木覓山)에 올라 이를 구경했다. 최민호 선수의 유도 금메달을 비롯해 우리나라가 역대 올림픽에서 격투기에 강했던 것은 민족의 이런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이덕일 역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