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 김정한
봉서방
2019. 11. 12. 19:45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 김정한
네 언어, 네 몸짓, 네 그림자가 만든 선물, 너 때문에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출렁이며 표류하고 있다. 그리움은 꿈결을 타고 흘러간다. 꿈속에서도 저벅저벅 너를 향해 걸어가지만, 마지막 한 걸음이 너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너를 애타게 부르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난, 꿈속에서도 외롭다. 사방에서 몰려든 너로 인해 강 속에 가라앉은 배처럼 내 몸은 뼈 속까지 너로 젖었다. 미운 기억은 몇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물속에 가라앉고 미치도록 간절했던 애정만이 뿌연 물 안개가 되어, 나를 감쌌다. 물안개 뒤에서 너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선명한 네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어찌할까. 기억 저편에 서있는 너를 지운다 해도, 내 숨결 속에는 늘 네가 있다. 마알간 추억을 움켜쥔 한 손은 너를 붙잡고, 유통기한이 지난 한 손은 너를 보내기를 수 백 번. 불타 버린 재가 되었을까. 푹 꺼져 버렸을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너,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의 들판에서, 날개 없는 새처럼 밤새도록 울었다.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사랑일 수밖에 없기에. 네가 떠난 빈 집을 지키며 다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오늘은 내 속에 머무는 너를 펼쳐 놓고, 아무리 읽으려 해도 하얀 백지뿐이다. 겹겹이 어두워지는 밤이 아프다.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이별하는 법을 모르는데 이별하고 있다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