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불

봉서방 2019. 10. 14. 21:59

이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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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어떤 사건 하나를 떠올린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지금, 그

사건의 기억이 유독 새롭다. 몇 년 전, 어머니는 인천 이모 댁으로 명절을 보내러 가

시게 되었다. “연탄불 꺼뜨리지 말아라.” 그러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

리 역시 외출을 했다. 저녁 늦게 귀가를 해서 보니 방안이 썰렁했다. 냉기가 온 집안

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나는 별반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불을 피우기에는 시간

이 너무 늦었고 엄마도 없는데 뭐, 전기장판의 전원을 켰다. 전기장판은 곧 훈훈하게

달궈졌고 나는 이내 잠들었다.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일찍 돌아오셨다. 밤새 불을 지

피지 않았던 어머니의 방은 더없이 냉랭했다. 어머니는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셨다. 아

궁이의 뚜껑을 열자 하얗게 타버린 연탄이 하나, 그 초췌한 몰골을 드러냈다. 그렇게

상심한 얼굴의 어머니를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

고 서서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를 내려다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어머니의 이마

에 깊게 패여 있던 주름들이 너무도 한스러워 보여서 나는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난

감하기만 했다. “연탄불 꺼뜨리면 집이 얼마나 썰렁한데, 얼마나 추운데…. 그게 얼

마나 싫고 무서운지 지들이 몰라….” 어머니의 입에서 혼자말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어머니가 아궁이의 뚜껑을 열던 순간, 내가 어머니의 눈에서 목격한 것이 무엇이었나

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 어머니는 아무 예

고도 없이 외박을 하신 적이 있다. 네 살바기 여동생과 나는 불꺼진 아궁이 위에 앉

아 바락바락 울어댔다. 그렇게 울고 있으면 어디선가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엄마가

빨리 집으로 달려올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 우리를 달래보려고 애

쓰던 언니도 마침내는 울기 시작했다. 언니가 울자 우리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서러

워졌다. “우리만 놔두고 도망간 거지?” 막내가 말했다. 언니가 막내의 뺨을 후려쳤

다. 막내는 맞은 것이 서러워서 다시 또 울기 시작했고 언니와 나는 막내의 말이 혹

여 사실은 아닐까, 두려워서 울었다. 밤새 우리의 두려움과 설움, 추위와 배고픔은 그

렇게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우리는 부엌 한 가운데 연탄 화덕을 놓고 둥글게 둘러

앉았다. 그러나 화덕 속에는 한 덩이의 연탄도 들어있지 않았고 한 줌의 온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화덕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

면 너무 추워서 너무 배가 고파서 곧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너 그거 알아? 사람

이 배고프고 춥고 졸리면 어떻게 하는지 말야. 그럼 대부분 다 자버린대. 그럼 자다

가 얼어죽는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자면 안돼. 알았지?” 언니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

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자꾸만 잠이 왔다. 졸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 아직도 밤이

었고 언니는 여전히 붉게 핏발이 선 눈으로 부엌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부엌 한 가운데 빈 화덕을 놓고 둘러앉아 있는 어린 딸들

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시던 어머니. 슬픔에 목이 메인 채로 어머니는 불을

얻으러 가셨다. 그 날 어머니가 가지고 돌아온 연탄불, 그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던 온

기를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지난 밤에 우리가 겪었던 공포와 배신감과 서러움의 응어

리는 어머니가 들고 오신 그 연탄불에 서서히 녹아 내렸다. 그 밤에 어머니와 아버지

는 구치소에 계셨다. 그 당시 나의 부모님들은 노점에서 장사를 하셨다. 그 날 두 분

은 단속에 걸렸고 구치소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어린 딸들만 추위와 배고픔 속에 던

져 놓았다는 죄책감으로 두 분은 밤새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겨울만 되면 어머니는 아

궁이에 불을 지피신다.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언제나 시간에 맞춰 연탄을 갈아

넣으신다. 밖에 나가서도 혹여 연탄불이 꺼지면 어쩌나, 노심초사다. 무슨 일이 있어

도 연탄불만은 꺼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어머니의 고집, 그것은 나의 어머니가 이 추

운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소중히 지켜내려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지금

도 나의 친정 어머니는 우리들 세 딸을 위해 언제나 집안을 훈훈하게 달구어 놓고 계

신다. 아니, 어머니가 우리 곁에, 우리의 집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벌

써 훈훈하게 달구어져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내게 어머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불꽃보다도 강한 온기다. ●

<필자는 꽃을 던지고 싶다>라는 소설집을 펴낸 소설가로,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현재 영등포 청과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있습니다(월간 ´샘터´에서)